"철도국자동차의 횡포에 저항키 위해 처음 조직된 조선자동차협회"
1915년부터 민영이나 관영의 자동차영업 허가권을 독점하고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철도국의 압박은 해가 거듭할수록 민간 업자들을 괴롭혔다. 민간업자들이 자비를 들여 애써 개척한 노선이 호황을 이루면 철도국자동차를 투입하여 강탈해 나갔다.
견디다 못한 민영업자들이 한번씩 들고 일어 나 항의를 하면 ⌜국영자동차의 사명인 철도건설을 돕기 위한것⌟이라며 발뺌을 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앞세운 강탈이었다. 20년대 후반 들어 전국 2백40여 업자로 늘어난 민영운수업자들은 드디어 관청의 횡포를 그대로 들 수 없다하여 1928년 `전 조선자동차협회`라는 민간업자 권익 보호단체를 서울에서 조직했다.

초대 회장은 일본 업자였지만 부회장은 전주의 버스 문전 서비스로 유명한 전북 운수업계 거목이던 최승열씨가 당선되어 민족 운수업의 저력을 과시했다.
⌜자동차협회조직--민간영업자가 단결하여 관영 자동차의 압박에 대항코져 민간에 있는 모든 자동차업자들이 모여 지난 3일(28년4월3일)에 서울에서 `전 조선자동차협회`를 조직하였다함은 이미 보도한바 이지만 동 협회의 취지를 말하면 조선의 교통발달이 근년에 이르러 장족의 진보를 보게 되어 처처에 자동차가 사통오달하는 터이나 자동차교통이 어느 정도로 발달하면 즉시 관영으로 경영하는 때문에 민영은 자연히 압박을 받는 일이 많으므로 이에 민간의 자동차업자들은 서로 힘을 합하여 이 피해를 방지 하고저 하는 것 이라는데,---. 조선일보 1928년 4월⌟
1927년 철도국은 그동안 난립해온 역 중심의 화물운송업자들을 대폭 정리하여 1역1업자체제의 원칙을 발표하고 국유화를 서둘렀다. 이 때문에 사상 초유의 전국 운수업자 궐기대회가 서울에서 일어나 1역1업자 원칙을 거세게 반대했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총독부는 이 여세를 몰아 전국의 물동량 수송을 독점하는 자본금 1백만원의 조선운송주식회사(마루보시)를 1930년 초에 설립하여 전국 각 역의 화물수송을 관장했다.
이 회사가 마크의 모양을 따서 불렀던 일제시대의 유명한 악질트럭회사 `마루보시`이다. 1926년부터 생겨난 각 지방 역 중심의 민영 화물트럭운수회사들도 `마루보시`의 철저한 통제를 받아 민간트럭들도 마루보시에 붙어 먹고사는 철도 기생자동차로 변해버렸다.

"일제의 2차대전 도발로 큰 수난 겪은 철도자동차들"
1930년을 넘어서면서 일제가 중국대륙 정복의 야욕을 성취하기 위해 일으킨 상해사변,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2차대전이 가까워질 무렵인 1938년부터 국내 모든 경제를 통제하여 군비확장에 혈안이 됐다. 특히 군용차용으로 비축할 휘발유 통제는 그 도를 넘어 39년부터는 배급제를 실시하여 민간 자동차들은 휘발유고갈에 고통을 당했다.
이뿐만 아니라 한 방울의 휘발유라도 비축하기위해 39년부터는 전국의 자동차를 도별 1개 업체로 통폐합하여 차량 수와 영업 노선도 단축시켰다. 이래서 생겨난 것이 각 도의 이름을 딴 운수업체 였다. 경기버스, 충북화물, 전남택시, 경북버스, 평남화물 등이 이들이다.
버스나 트럭이나 택시 할 것 없이 각 도의 도청소제지 역을 터미널로 지방간을 왕래하는데, 트럭은 거의 전시동원령에 묶여 전쟁이 일어나면 군용트럭으로 징발당할 운명이었고, 버스들은 전쟁용으로 별 쓸모가 없는 대신 연료를 절약시키기 위해 운행노선을 대폭 줄여 왜만한 고을이라도 하루에 오전 한번 오후 한번밖에 운행하지 않아 여객교통을 마비시켰다. 이래서 기차를 타려면 40~50리는 걸어 다녔다. 일제는 전쟁준비로 38년부터 자동차와 부품의 수입도 일체 금지시켜 거의가 고물자동차인데도 적제능력의 두베 이상 승객과 화물을 실은 자동차들은 운행 중 고장 잘 나서 버스의 경우 정시운행은 꿈도 못 꾸었다. 결국 40년부터는 병아리 오즘 만큼 주던 휘발유배급도 끊어버려 목탄차 신세로 해방을 맞아야 했다.
전영선 소장 kacime@kornet.net <보이는 자동차 미디어, 탑라이더(www.top-rid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