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들과 기생들 덕에 잘 나가던 택시들이 제1차 세계대전 후유증으로 생긴 20년대 초 세계적인 경제공황의 거센 파도는 우리나라에도 예외 없이 밀려와 부자들이 돈주머니를 졸라매는 바람에 한동안 택시업계가 파리를 날린 적이 있었다.

이 파동을 당하기 직전까지 대절택시 사업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매일신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수년전부터 부랑탕자들이 기생들과 자동차타고 한강철교, 창경원, 장춘단공원 등으로 횡행하는 행락이 발동하야 이것이 시작된 후로는 차차 정도가 심하야 근래에 이르러서는 시내 각 자동차영업자들은 부랑탕자나 기생 아니면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밀접한 관계로 인하야 해마다 늘어나는 것은 탕자들이요 찾는 것은 자동차분일진데, 재물에는 X광선만큼 밝은 자본가들은 서로 다투어 수 만원씩 투기하야 우후죽순같이 자동차부(自動車部; 자동차회사)를 설치하게 된 것이 근래에 이르러서는 경성내만 하여도 30여 군데나 되더라. 그리하여 4~5척의 자동차를 놓고 한 1시간에 6원씩 받고 세를 놓는데도 어찌나 주문이 답지하는지 얻어 타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비록 대절한다 하여도 기계 좋고 자리 편한 자동차는 주문하기 어렵다더라. 더욱이 일요일 같은 날에는 자동차부를 모조리 뒤지더라도 병난 차밖에는 노는 차를 보지 못할 만큼 기세가 좋더니…⌟ 봄, 가을 성수기 때는 자동차들이 불이 나듯 불려나가자 업자들도 뱃장을 튕겼다. 즉 부자들도 3등급으로 나누어 돈 후하게 주는 갑부는 미제 최고급차인 컨닝험이나 비크를, 중급 세도가들에게는 시보레나 월리스를, 하급인 보통부자들은 싸구려차인 포드를 빌려주었다.

그런데 기고만장하던 택시업자들은 1920년 5월부터 불어 닥친 세계적인 경제대공항의 타격으로 시중에 돈이 바닥나고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뛰어오르자 e자동차 찾는 주문이 뚝 끊어져 울상이 되고 말았다.
⌜수년전부터 그리도 세월이 좋던 경성의 대절자동차들이 요즘에는 어찌된 일인지 자동차주문에 불이 난 듯 하던 전화통이 잠잠하여진 이후로는 하루 두 세통씩 쓰던 휘발유가 며칠 전에 사다 놓은 것을 그 반통도 사용하지 못하는 형편이며, 혹시 때때로 낮잠 깨우는 전화가 온다하여도 알고 보면 외상 자동차 좀 태워달라는 간청뿐이라.
이러므로 그만 무슨 큰 수나 날듯이 논문서 밭문서를 앗김 없이 전당을 하여가며 만든 빚을 얻어 가지고는 일건 벌려 놓은 자동차부는 쓸데없이 사무원들의 장기 바둑판집이 되어가고, 머나먼 곳에서 거액의 운임을 들여 사 온 자동차는 부질없이 일없는 운전수들의 낮잠터가 되는 모양이더라.⌟ 이 경제공황여파는 그 후 1921년 중반부터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여 다시 대절 자동차는 호황을 누렸다.
전영선 소장 kacime@kornet.net <보이는 자동차 미디어, 탑라이더(www.top-rid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