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국내 방송사의 TV 중계를 통해 F1 그랑프리의 퀄리파잉을 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람들의 인식도 퀄리파잉을 ‘예선’으로 받아들이고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퀄리파잉을 ‘예선’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냥 예선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모터스포츠의 퀄리파잉에 담긴 의미가 너무 많고 복잡하다. F1 그랑프리를 중계하는 다수의 방송사에서 퀄리파잉 뿐 아니라 세 차례의 연습 주행을 생중계하고, FIA에서 레이스와 마찬가지로 퀄리파잉과 연습 주행을 공식 세션으로 보는 것도 퀄리파잉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예선’의 의미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F1 그랑프리의 퀄리파잉은 재미있다. 종종 레이스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야구로 비교하자면 세 차례의 연습 주행이 각각 1, 2, 3회, 퀄리파잉이 4, 5, 6회, 레이스가 7, 8, 9회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결과가 나오는 것은 9회지만 대부분의 경기에서 7회부터 야구를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F1 그랑프리의 퀄리파잉은 가장 중요한 경기 중반부를 장식하며 레이스 결과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스타팅 그리드를 결정한다. 순위 경기인 레이스와 달리 기록 경기인 퀄리파잉이 가지는 박진감은 대부분의 레이스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다.
때문에 퀄리파잉에서 보여주는 드라이버들의 집중력은 상당히 높고, 레이스 못지 않은 치열한 경쟁과 전략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머리 싸움이 펼쳐진다. 레이스카의 속도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고 가장 빠른 랩 타임이 기록되는 것도 퀄리파잉이다. 덕분에 짧고 굵은 승부가 펼쳐지는 퀄리파잉은 종종 과열 양상을 띠기도 한다. 퀄리파잉에서의 0.001초가 레이스에서 1분 이상의 격차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 2014 모나코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 옐로우 플랙 상황을 만든 로스버그
2014 모나코 그랑프리의 퀄리파잉 종반 벌어진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모나코 그랑프리라면 퀄리파잉의 중요성이 그 어느 경기보다 크게 부각되는 곳이다. 한 번의 실수가 사고로 이어져 모든 것을 망칠 수도 있고, 짧은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린다. 랩 타임이 점점 빨라질 수 밖에 없는 퀄리파잉 종반에는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보다 나아진 트랙 상황에서 탑텐 드라이버들이 최고의 기량을 뽑아내는 마지막 트라이는 퀄리파잉의 백미다. 그렇게 모두가 한껏 집중하고 있는 순간 사건이 발생했다.
모나코 그랑프리의 퀄리파잉 마지막 랩, 메르세데스의 니코 로스버그는 턴05 미라부에서 브레이킹에 실패하며 짧은 탈출로에 차량을 세웠다. 곧 마샬들은 옐로우 플랙을 흔들기 시작했고 뒤따르던 해밀튼은 속도를 늦출 수 밖에 없었다. 해밀튼은 로스버그가 멈춘 지점이전까지 자신의 기록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로스버그는 미세하게 앞섰던 ‘보수적으로 임하는 첫 번째 주행’의 기록을 바탕으로 폴 포지션을 확보했다.
곧바로 로스버그의 움직임에 대한 스튜어드들의 조사가 시작됐다. 눈에 띄는 증거를 찾기는 어려웠지만 정황상 로스버그의 드라이빙에 고의성이 있었는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짧지 않았던 스튜어드들의 조사에서 로스버그에게 고의성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연습주행부터 그랑프리 주말 전체를 통틀어 페널티 문제에 상당히 관대했던 스튜어드들의 성향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로스버그의 드라이빙에서 명확한 고의성을 찾아낸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판정은 수긍할 만 했다.
하지만 팬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일부는 로스버그가 고의적으로 옐로우 플랙을 불러내지 않았다는 스튜어드의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또 다른 일부는 계속해서 로스버그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로스버그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2006 모나코그랑프리에서 미하엘 슈마허가 보였던 움직임을 떠올렸을 것이 분명하다.
▲ 2006 모나코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 옐로우 플랙을 소환한 슈마허
2006년은 상당히 재미있는 경쟁이 펼쳐지던 시즌이었고 모나코 그랑프리를 앞두고 긴장감은 한껏 높아졌다. 5년 연속 챔피언과 통산 일곱 차례 드라이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던 미하엘 슈마허는 이전 시즌의 부진을 극복하고 다시 한 번 챔피언 타이틀 경쟁에 나섰다. 페라리와 슈마허의 독주를 막고 2005 시즌 왕좌에 오른 르노와 알론소는 2년 연속 챔피언 타이틀 획득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두 팀은 6 라운드까지 네 차례와 두 차례의 우승을 나눠가지고 있었다.
윌리암스의 경쟁력 역시 상당했고 숏런에서는 결코 페라리와 르노에 뒤지지 않았다. 맥라렌은 2005년에 비해 다소 경쟁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모나코에서만큼은 강한 경쟁력을 보일 수 있었다. 슈마허와 알론소는 물론 맥라렌의 라이코넨과 몬토야, 윌리암스의 퀄리파잉스페셜리스트 웨버까지 모두가 모나코의 폴 포지션을 노릴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건이 터졌다. 슈마허는 퀄리파잉 막바지 라스카스에 차량을 세웠다. 두 번째 섹터까지 슈마허보다 0.2초 빨랐던 알론소는 기록을 당길 수 없었고, 랩 타임 기준 2위가 되었다. 슈마허는 “라스카스를 앞두고 락이 걸렸고, 너무 넓게 돌게 됐기 때문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스튜어드들의 생각은 달랐다. 슈마허는 최후미 그리드에서 레이스를 시작하도록 페널티를 받았고, 알론소에게 폴 포지션이 주어졌다. 니코의 아버지인 케케 로스버그는 슈마허의 행동을 맹비난했다.
▲ 2007 헝가리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남긴 알론소
올 시즌 모나코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2006 모나코 그랑프리의 사건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또 하나의 퀄리파잉에서 발생한 사건도 오버랩 된다. 바로 2007 헝가리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 맥라렌 팀메이트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당시의 피해자는 올해 모나코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 피해를 본 해밀튼이였고, 가해자는 2006 모나코 그랑프리의 피해자였으나 슈마허의 페널티로 ‘구제’된 알론소였다.
2007 시즌 헝가리 그랑프리를 앞둔 상황 역시 2006 모나코 못지 않게 엄청난 긴장감이 도는 상황이었다. 가장 빠른 차량을 보유한 맥라렌은 2006년의 다소 부진했던 모습을 딛고 선두를 질주하고 있었고, 2년 연속 챔피언인 알론소가 카 넘버 1번과 함께 팀에 합류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의 팀메이트는 수퍼 루키로 데뷔 직후 아홉 그랑프리 연속 포디엄 피니시의 괴력을 뽐내고 있었다. 헝가리 그랑프리를 앞둔 두 드라이버의 포인트 차이는 단 2포인트에 불과한 상태로 챔피언십 포인트 순위에서 1, 2위랄 다투고 있었다.
여름에 접어드는 길목에서 헝가리 그랑프리를 맞이할 무렵 맥라렌 드라이버들의 갈등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두 드라이버는 레이스에서 맞부딪힐 때마다 같은 팀 드라이버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하게 자리 싸움을 펼쳤다. 팀메이트와의 경쟁 문제부터 셋업 카피에 대한 이슈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팀에 대한 알론소의 불만은 커져있었다.
그런 가운데 헝가리 그랑프리의 퀄리파잉이 시작됐고, 맥라렌은 다른 팀과 비교해 분명하게 우위에 선 스피드를 보여줬다. 모나코만큼은 아니지만 추월이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헝가로링은 모나코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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퀄리파잉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알론소가 마지막 주행에 사용할 타이어 교체를 위해 핏박스에 설 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알론소는 타이어 교체가 끝난 뒤에도 핏 박스를 떠나지 않았다. 처음 20초는 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맥라렌은 ‘트래픽을 피하기 위해’ 알론소를 핏 박스에 멈춰 서 있게 했다. 하지만 알론소는 충분한 간격이 확보된 이후에도 10초 가량 더 핏 박스에 서 있었다. 그 사이 마지막 트라이를 위해 핏 박스에 들어오려던 해밀튼은 뒤에서 마냥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알론소는 체커드 플랙이 나오기 2초전 플라잉 랩을 시작했고, 해밀튼에겐 5초가 모자랐다. 맥라렌의 보스인 론 데니스는 헤드셋을 집어 던지며 분노했다. 이 문제로 스튜어드들의 조사를 받은 알론소에겐 5 그리드 페널티가 주어졌고, 해밀튼은 다시 폴 포지션에서 레이스를 시작할 기회가 주어지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해밀튼은 결국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두 드라이버 사이의 앙금은 시즌이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 모나코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 명암이 갈린 로스버그와 해밀튼
2014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로스버그가 옐로우 플랙을 소환한 사건은 스튜어드들에 의해 고의성이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조사가 이뤄졌고 심사 결과가 나온 사건의 숨은 의도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어떻게 결론이 나든 퀄리파잉의 과열은 앞으로 충분히 재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로스버그와 해밀튼의 사이에는 지난해까지와 전혀 다른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10 여 년 동안 ‘주변 사람이 보기에’ 친구처럼 잘 지내던 로스버그와 해밀튼은 어쩌다 이렇게 과열 경쟁 구도를 만들게 된 것일까?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바로 ‘챔피언 타이틀’ 때문이다. 만약 확실하게 챔피언 타이틀을 노릴만한 우위가 확보되지 않았다면 이런 과열 경쟁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지 모르는 타이틀 도전 기회를 놓고 비슷한 퍼포먼스를 가진 두 드라이버가 같은 차에 앉아 있는 것이 문제다.
해밀튼이 이미 인터뷰에서 밝혔듯 두 드라이버의 경쟁은 마치 사반세기 전 맥라렌에서 경쟁하던 알랑 프로스트와 아일톤 세나의 경쟁과 비슷하다. 팀은 압도적인 레이스 카를 준비했고, 드라이버 간에 우열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레이스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기록 경쟁으로 펼쳐지는 퀄리파잉에서는 남을 탓할 수 없다. 누가 더 빠른가라는 자존심 싸움에서 퀄리파잉 배틀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전장이다.
특별한 단점이 보이지 않는 강력한 레이스카는 레이스에서 팀메이트 간 추월을 더 어렵게 만든다. 때문에 일단 퀄리파잉에서 앞서는 것이 중요하다. 레이스에서 팀 오더가 나올지 모르므로 일단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챔피언을 노리는 강팀의 걸출한 드라이버들만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다. 1982 시즌 페라리의 디디에 피로니 와 질 빌너브가 그랬고, 1988/89 시즌 맥라렌의 프로스트와 세나가 그랬다. 그리고 때때로 최강 팀의 팀메이트간 갈등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올 시즌 해밀튼과 로스버그의 퀄리파잉 배틀은 어떤 결론을 맞이하게 될지 궁금하다.
F1 2014 시즌이 메르세데스의 독주로 재미가 반감됐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일단 드라이버 챔피언 타이틀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기준으로 봤을 때 2014 시즌 로스버그와 해밀튼의 경쟁은 그 어떤 시즌 못지 않게 재미있다. 때로는 퀄리파잉이 과열되더라도 심각한 사고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흥행에 도움을 주는 요소가 될지 모른다.
앞으로 지금까지 치른 그랑프리보다 두 배나 많은 그랑프리가 남아 있고, 모두 열 세 차례의 퀄리파잉이 더 치러져야 올 시즌이 끝난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드라마와 사건이 펼쳐지게 되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