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 드라이버 문제는 F1의 오랜 화두다. 돈으로 ‘드라이버 시트를 사서’ 그랑프리에 참가
하는 페이(pay) 드라이버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F1 무대에 존재해왔다. 하지만 최근처럼
페이 드라이버가 많은, 아니 거의 대부분이 ‘페이 드라이버일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
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특히 유능한 드라이버가 돈을 낼 수 없어 한 명 한 명 F1 무대를 떠날 때마다 논란은 가속화된다.

페이드 드라이버가 사라져간다
페이 드라이버는 현재의 F1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페라리, 메르세데스, 레드불 등 소위 ‘돈 걱정 없는’ 대형 팀들이나 재정 문제를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는 토로로쏘를 제외한 모든 팀들은 페이 드라이버를 원한다. 꼭 두 시트를 다 페이 드라이버로 채울 생각은 없더라도 최소 한 명 정도는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오는’ 드라이버가 필요하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드라이버와 무관하게 팀을 지원하던 스폰서가 상당수 사라진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팀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랑프리에 참가하는 페이드(paid) 드라이버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100% 페이 드라이버가 아니다’라고 얘기할만한 드라이버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페이 드라이버의 성격이 짙은 드라이버가 다수인 상황이다. 케이터햄이 사라지면서 코바야시가 자연스럽게 시트를 잃었고, 수틸 역시 재정난에 허덕이는 자우버를 떠난 뒤 새 시트를 찾지 못했다.
공기역학 부문의 연구 개발비 등 천정부지로 치솟는 팀 운영비를 대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드라이버에게 급여까지 지불할 여유를 부리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중소 독립 팀의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로터스, 자우버, 포스인디아가 모두 상당한 재정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페이드 드라이버는 꿈같은 소리다. 남은 선택지는 그나마 페이 드라이버 중 실력이 나은 경우를 찾는 것뿐이다.

빈 자리가 없다
지난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F1에는 11개 팀에 모두 22개의 드라이버 시트가 있었다. 하지만 케이터햄과 마루시아의 좌초로 시트는 18개까지 줄었고, 마루시아가 매노어로 간신히 무덤을 빠져 나왔지만 여전히 드라이버 시트는 20개에 불과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24~26개의 시트가 있었던 시절과는 세상이 많이 변했다. 먼 과거에는 30개 이상의 시트가 존재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다.
문제는 정규 드라이버 시트가 줄어드는 것뿐이 아니다. 과거에는 페이 드라이버가 가져오는 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정규 드라이버 시트를 내준 뒤, 능력 있는 드라이버를 테스트/리저브 드라이버 역할을 맡긴 뒤 훗날을 도모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년 자금을 마련하기가 여의치 않아 페이 드라이버라기보다 페이드 드라이버에 가까운 경우에 이처럼 테스트/리저브 드라이버로 1년 정도 정규 시트를 포기하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마저도 쉽지 않다. 팀의 재정난이 극심해지면서 테스트/리저브 드라이버는 물론 ‘개발 드라이버’나 ‘시뮬레이션 전담 드라이버’ 등 정규 드라이버가 아닌 자리에도 페이 드라이버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F1뿐 아니라 F1 팀이 산하에 거느리고 있는 하위 포뮬러(GP2, GP3 )의 드라이버 개발 프로그램에도 페이 드라이버가 넘쳐난다.
최근 로터스가 개발 드라이버로 발표한 카르멘 호르다의 경우 GP3에서 세 시즌 동안 단 1포인트도 얻지 못했는데(1승도 못 거뒀다는 게 아니라 포인트를 단 한 점도 얻지 못했단 얘기다. ) 역할 수행이 가능하겠냐는 날 선 비판이 있었다.

부익부 빈익빈?
현재 F1 드라이버 중 팀으로부터 연간 100만 유로(한화 12억 원) 이상을 받는 드라이버는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 중 자신이 받는 돈의 대부분 혹은 전부를 자기가 끌고 온 스폰서 머니에서 충당하는 경우도 많다. 나머지 절반 정도의 드라이버들이 받는 돈은 100만 유로가 안 되는 것은 물론 10만 유로(한화 1억 2천만원) 정도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다. 페이드 드라이버라고 불렸지만 실제로 버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는 뜻이다.
이처럼 돈을 내고 F1 드라이버 신분을 유지하거나 극히 적은 수입에 만족하는 이가 많은 반면, 대여섯 명의 드라이버들은 1,000만 유로(한화 120억 원) 이상의 수입을 자랑한다.
올 시즌이 끝나면 메르세데스와의 계약이 만료되는 디펜딩 챔피언 해밀턴의 경우, 메르세데스와 계약 연장을 논의하면서 2천만 파운드(한화 기준 300억 원 이상 )를 최소한의 조건으로 협상에 나서고 있다.
결국 차를 개발하고 팀을 운영하는데 돈을 물 쓰듯 하는 대형 팀들이 드라이버들에게도 천문학적인 액수를 소비하고 있다. 돈이 없는 중소형 팀은 한 명 정도 페이드 드라이버를 쓸 생각을 하더라도 ‘정말 뛰어난 드라이버’를 영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오르지 못할 나 무를 쳐다보는 격이다. 로터스의 경우 2년간 트랙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라이코넨이라는 거물을 데려올 수 있었지만 그나마 인센티브 위주의 계약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로터스는 계약된 인센티브마저 제때 집행하지 못했다. )

타협점은 어디에?
갑자기 F1 팀들의 경제 사정이 평등해지지 않는 한 페이 드라이버에 의존하는 중소 팀들의 현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어느 선까지 페이 드라이버가 가져오는 돈에 의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자우버는 올해 유능하긴 하지만 어쨌든 페이 드라이버 성격이 짙은 두 명의 드라이버 에릭슨과 나스르로 드라이버 라인업을 꾸렸다. 하지만 기존에 계약을 가지고 있던 반데가르데와의 법정 싸움에서 패하면서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페이 드라이버들이 가져오는 돈이 적어도 문제지만 막상 계약을 한 뒤 입금이 안되던 것도 문제다. 또 정치적인 상황 등 외부적인 여건으로 입금 예정이던 돈이 막혀버리면 팀의 재정 상황은 급격히 어려워진다. 최근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으로 러시아 자금이 묶인 것 때문에 F1뿐 아니라 많은 모터스포츠 팀들이 한꺼번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세르게이 시로츠킨과 얽혔던 자우버와 포스인디아가 모두 비슷한 상황으로 애를 먹은 바 있다.
페이 드라이버의 기량도 문제다. 최근 F1에 발을 들인 드라이버 중 상당수가 어느 정도 페이 드라이버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 사이에도 기량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마루시아의 무덤에서 부활한 매노어가 윌 스티븐스에 이어 두 번째 드라이버를 구하면서 ‘페이드라이버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런 관점에서 낙점된 로베르토 메르히는 분명 페이 드라이버의 성격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메르히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페이 드라이버처럼 돈만 내고 F1 시트에 앉으면 만족하는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된 기량을 하위 포뮬러에서 입증한 실력파 루키다.
결국 지참금을 살펴보면서 드라이버를 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F1 중소 팀들은 적절한 자금과 일정 수준 이상의 기량, 그리고 가능하다면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까지 동시에 갖춘 페이 드라이버를 찾아야 하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한다. 드라이버 라인업을 어떻게 배분해 꾸릴지, 실력과 지참금에 각각 어느 정도 비중을 둬야 할지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페이 드라이버의 증가로 팬들이 아쉬워하는 것 이상으로 F1 팀들의 머리는 더 복잡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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