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2012 시즌을 앞두고 새 시즌 규정 변화에 맞춘 레이스카가 공개되었을 때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른바 ‘스텝드 노즈’로 불리는 계단처럼 층진 노즈 디자인이 문제였다. 대부분의 팀들이 ‘스텝드 노즈’를 채택한 가운데 전통의 강팀인 맥라렌은 예외적으로 매끄럽게 빠진 아름다운 노즈 디자인의 레이스 카를 선보였다. 그리고 시즌 개막전인 호주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한 맥라렌의 젠슨 버튼은 “(우리) 차는 아름답고, 그녀는 빨랐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012 시즌의 챔피언 경쟁은 ‘아름답지 못했던’ 레드불과 페라리의 대결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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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달 전 F1 2014 시즌 개막을 앞두고 새로운 레이스카가 공개되자 팬들은 2012
년과는 비교하기 힘든 큰 충격에 빠졌다. 과연 빨라지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의 해괴망측한 노즈 디자인이 각 팀에서 쏟아져 나왔다. 물론 F1에서 ‘더 빠르지만 아름답지 못한’ 차가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 F1 레이스 카에 처음 부착되기 시작한 ‘윙’의 초창기 모습
1960년대 중반까지 그랑프리 레이스에 출전하는 레이스카의 형태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긴 원통형의 차량 디자인은 1930년대의 그랑프리 레이스 카와 크게 달라지지 않
았고, 제 2차 세계 대전 이전을 기준으로 본다면 일반인들에게 판매되는 스포츠카의 디자인과도 비슷한 면이 많았다. F1이 출범한 뒤에도 차체가 조금씩 납작해진 것이나 엔진의 위치가 드라이버 앞쪽에서 뒷쪽으로 옮겨간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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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40년 가까이 사람들의 눈에 익었던 차량 디자인은 1960년대 말 큰 변화를 맞았다.
F1 레이스카에 윙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차량 뒷쪽 높은 위치에 붙은 날개는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복엽기를 연상하게 했고, 프론트에까지 같은 형태의 윙을 단 차량이 등장하기도 했다. 지금은 레이스 카는 물론 시판 스포츠 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윙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반응은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일단 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물론 불안해 보였고( 실제로 많은 사고가 났다. ), 무엇보다 기존의 ‘아름다운 차’에 대한 이미지와 맞지않았다.
▲ 익숙해지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 로터스 72의 혁신적인 디자인
윙의 형태가 보다 안정되고 노즈는 납작한 쐐기 모양의 웻지 윙 형태로 바뀐 것은 물론 사이드포드가 콕핏 양쪽에 붙기 시작한 로터스 72의 디자인은 더 큰 이질감을 불러왔다. 시간이 지난 뒤에는 콜린 채프만의 혁신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의 분위기가 썩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70 시즌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게 될 요헨 린트 역시 새로운 시스템이 계속 추가되는 것을 상당히 못마땅해했다. 새로운 디자인은 팬들에게 더욱 낯설게 여겨졌다.
하지만 1970년부터 등장한 새로운 디자인의 흐름은 1970년대 레이스 카 디자인의 기본이 되었다. 잠시 등장했던 롤 후프 위로 높게 솟은 에어 덕트가 사라지고, 1970년대 말 등장한 그라운드 이펙트를 위한 디자인( 사이드 스커트나 벤츄리 터널 ) 등이 나타나고 또 사라져갔지만, 너무나도 어색했던 ‘사이드포드의 존재’만큼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포뮬러 레이스카라면 당연히 당연히 사이드포드가 달린 모습을 떠올리고, 그 형상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 1990년대 초 등장한 하이 노즈 디자인의 레이스 카 중 하나인 베네통 B192
F1 레이스 카의 디자인은 1990년대 초에 은근한 변화를 맞이했다. 이른바 ‘하이 노즈’의
등장이 그것이다. 어떻게든 땅에 바짝 달라붙도록 만드는 것이 최고라고 여겨지던 차량 디자인 철학은 큰 변화를 맞았고, 1990년대 중반에 다다르면서 많은 팀들이 하이 노즈의 효과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엔지니어들에게는 하이 노즈가 정답이었다. 하지만 기술적인 요구에 의해 바뀐 차량의 모습은 팬들에게 결코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다.
낮게 깔린 ‘노즈 콘’의 멋진 레이스 카들에 익숙해 있던 F1 팬들에게 들창코처럼 바짝 들린 노즈는 탐닥지 않게 여겨졌다. 기존의 ‘비행기’ 같은 이미지가 있던 포뮬러 레이스카가 왠지 ‘배’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도 불만 아닌 불만이었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하이 노즈가 F1의 주류가 되어가는 사이 팬들 역시 서서히 하이 노즈에 적응해 버렸다. 2000년대로 넘어 와서는 사람들이 로우 노즈와 하이 노즈라는 개념 자체를 가지고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를 따지지는 않게 되었다. 이제는 하이 노즈가 어색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 많은 팬들을 당황시킨 2014 시즌 레이스 카 맥라렌 MP4-29의 노즈 디자인
2000년대 들어서도 차량 디자인은 여러차례 ‘아름다움’과 공기역학적 효과’의 딜레마 속
에서 난제를 풀어야 했다. 2000년대 중반에는 너무나도 많은 에어로 파츠가 차량 외부에
덕지덕지 붙는다고 불평 불만이 쏟아졌고, 2009년 대부분의 에어로 파츠가 금지되자 반대로 이전이 좋았다는 사람들도 나왔다. 2009년 리어 윙이 높고 좁게 바뀌었을 때는 ‘이렇게 못 생긴 F1은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어찌된 일인지 높고 좁은 리어 윙이 크게 어색해보이지 않는다.
2012년 이른바 ‘스텝드 노즈’의 등장은 차량 디자인에서 엔지니어적인 접근과 미적 접근
중 어느 쪽이 중요한지에 대한 극명한 대립을 보여줬다. 결국 많은 팀들은 아름다움보다는 성능을 택했다. 아쉽게도 ‘익숙한 모양’이나 ‘부드러운 곡선’만으로는 충분한 성능을 낼 수 있는 시대가 지났다. 이듬해 ‘코스메틱 패널’ 즉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부품 추가를 허용했지만 일부 팀은 이마저도 채택하지 않았다.
아름답지 않은 레이스 카들이 달리는 F1은 아무래도 아름다운 레이스카가 달리는 F1보다는 덜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특히 각 F1 팀의 엔지니어들은 더 빠른 차량을 원한다. 비슷한 경향은 스포츠카 디자인, 특히 수퍼카 디자인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기존에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던 디자인에 익숙해져버릴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2014 시즌의 ‘매우 아름답지 않은’ 디자인에 사람들이 익숙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사람들이 이 당황스런 디자인에 익숙해지기 전에 규정이 정비되면서 자연스럽게 보다 아름다운 디자인의 차량이 만들어지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