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2014 시즌이 개막되자마자 메르세데스가 무서운 독주를 시작했다. 새로운 규정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파워 유닛과 함께 야심차게 준비한 메르세데스 W05는 그리드에서 단연 가장 강력한 레이스카로 평가 받고 있다. 메르세데스에 합류하자마자 슈마허를 압도했던 니코 로스버그와 맥라렌에서 이적하고 적응기가 지나자 제 기량을 회복한 해밀튼 모두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메르세데스에 합류한 최고의 엔지니어들도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쳤다.
올 시즌 펼쳐진 네 차례의 그랑프리에서 메르세데스는 모든 퀄리파잉에서 폴 포지션을 차지했고, 레이스에서는 모든 우승컵을 독점했다. 세 차례의 원-투 피니시와 함께 획득 가능한 최대 포인트인 172 포인트 중 90%에 달하는 154 포인트를 차지했다. 패스티스트 랩 역시 메르세데스가 독점했는데, 네 차례 그랑프리 연속 패스티스트 랩을 같은 팀의 드라이버가 기록한 것은 세 시즌 만에 처음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메르세데스의 독주가 F1의 재미를 반감시킨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치열한 경쟁이 펼쳐져야 레이스가 재미있어지는 만큼 메르세데스 독주 때문에 충분한 재미를 느끼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F1 역사의 상당 부분이 올 시즌과 같은 독주의 역사였다는 점이다. 물론 시즌 초반의 페이스만 놓고 보면 메르세데스의 독주가 유례 없는 페이스이긴 하지만, F1의 오랜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것도 F1의 일부’라는 이야기가 나올 만 하다.
▲ 1954, 1955시즌 트랙을 지배한 메르세데스-벤츠 W196
F1은 알파 로메오의 독주와 함께 시작됐다. F1 월드 챔피언십이 막을 연 1950시즌과 이듬해 1951시즌은 알파 로메오의 독무대였다. 알파 로메오가 F1에서 철수한 뒤 F2 규정으로 치러진 1952시즌과 1953시즌 페라리는 무적의 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그리고 메르세데스-벤츠의 복귀와 함께 사실상 처음으로 ‘빔 팀들의 제대로 된 경쟁’이 예상됐던 것이 1954시즌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기대와 달리 ‘누군가의 독주를 막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순위 경쟁’은 펼쳐지지 않았다.
사실상 최초의 빅 팀 사이에 펼쳐진 경쟁에서 압승을 거둔 것은 메르세데스-벤츠였다. 1954 시즌 중반 투입된 명차 W196은 단 열 두 차례의 챔피언십 그랑프리에 출전해, 9승-폴 포지션 8회-패스티스트 랩 9회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W196이 출전한 마지막 네 차례 그랑프리의 성적은 모두 원-투 피니시였다. 어떤 의미에서 2014 시즌 메르세데스의 독주는 60년 전의 역사를 다시 보여주는 듯 하다.
물론 당시에도 메르세데스-벤츠와 W196의 독주, 그리고 2년 연속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 쥔 판지오의 계속된 우승에 흥미를 잃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많은 팬들은 메르세데스-벤츠가 이룬 성과와 W196의 우수한 성능을 칭송하면서 오히려 F1에 많은 관심을 더하기 시작했다. F1 초창기의 전설적 영웅인 판지오의 업적에 대해서도 재미를 따지기보다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돋보였던 그의 위대함을 높이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1988시즌 F1을 평정한 맥라렌 MP4/4
당연한 얘기지만 F1의 역사는 대부분 독주의 역사로 점철됐다. 간혹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해가 있었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상 경쟁이 어려울 정도로 한 팀의 퍼포먼스가 두드러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F1의 인기가 절정으로 치솟기 시작한 1988시즌도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네 명의 영웅, 피케-프로스트-만셀-세나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1986, 1987시즌에 정점을 찍었지만, 실제로 F1의 인기가 드높아진 결정적인 시즌은 1988 시즌이었다.
1988시즌 맥라렌 MP4/4는 트랙 위의 최 강자였다. 더블 챔피언 프로스트와 로터스에서 빛났던 브라질리언 세나는 최고의 드라이버였다. 혼다의 터보 엔진은 페라리를 포함한 다른엔진을 압도했다. 승부의 추는 시즌 초기 이미 맥라렌으로 기울었고, 챔피언 타이틀 경쟁은 맥라렌 드라이버 사이의 팀메이트 경쟁으로 빠르게 압축됐다. 프로스트가 시즌 중반 ‘올 시즌 맥라렌이 모든 그랑프리에서 우승할 것’이라는 발언은 허언이 아니었다.
같은 해 맥라렌은 단 한 차례를 제외한 모든 그랑프리에서 폴 포지션을 차지했고, 16 차례의 그랑프리 중 15 차례 포디엄 정상에 올랐다. 맥라렌이 우승하지 못한 단 한 차례의 그랑프리는 프로스트와 세나가 모두 리타이어한 이탈리아 그랑프리 단 한 차례뿐이었다. 맥라렌의 우승 중 아홉 차례는 원-투 피니시였다. 팀 순위 2, 3위 오른 페라리와 베네통의 포인트를 모두 더하더라도 프로스트 한 명이 기록한 포인트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8시즌이 가장 흥했던 F1 시즌 중 하나로 꼽는 것은 역시 ‘어떤 팀이 챔피언이 되었는가’보다 ‘한 시즌의 내용이 어땠는가’하는 것이 F1의 본질적인 재미를 가늠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 1992시즌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윌리암스 FW14B
한 팀이 독점적으로 지배한 시즌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또 하나의 시즌은 1992시즌이다. F1 역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레이스카로 손꼽히고 일부에서는 ‘오버 테크놀로지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 FW14B는 말 그대로 압도적인 성능을 뽐냈다. 후세에는 액티브 서스펜션의 위력만으로 단순화돼서 그 위대함이 덜 느껴지기는 하지만, FW14B는 다양한 기술적인 성과 외에도 레이스카로서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고 평가할만한 명차였다. 높은 다운포스를 유지해 코너 공략 속도와 조종성이 뛰어났던 것은 물론, 차량의 밸런스와 더불어 신뢰도와 안정성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나이젤 만셀은 시즌 개막 후 첫 여섯 차례의 그랑프리에서 폴 포지션을 독점했고, 다섯 차례 그랑프리에서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 중 네 차례는 원-투 피니시였다. 1992시즌 열 여섯 차례의 그랑프리 중 열 네 차례의 폴 포지션이 윌리암스의 것이었고, 열 차례의 그랑프리 우승, 패스티스트 랩 11회, 여섯 차례의 원-투 피니시가 그들의 최종 성적이었다.
만셀은 혼자서 맥라렌이나 베네통이 팀 단위로 거둬들인 포인트보다 많은 포인트를 획득했다.
하지만 1992시즌에 대한 반향은 1988시즌의 경우와는 사뭇 달랐다. 만셀의 고국인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고대했던 만셀의 극적인 챔피언 등극을 높이 사기도 했지만, 일부 드라이버들을 포함해 적지 않은 팬들이 윌리암스의 독주에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한 팀의 독주가 심하기로는 1988시즌이 더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1992시즌이 저 평가 받는 이유는 굳이 따지자면 압도적인 레이스카의 성능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한 시즌 동안 흥미로운 이슈가 적었고, 팀간 배틀은 물론 팀 내 배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다소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영국을 제외하면 프로스트나 세나에 비해 만셀 혼자서 견인할 수 있는 인기의 절대량이 부족했던 것도 문제였을 것이다.
▲ 2004시즌 절대 강자였던 페라리 F2004
2004시즌의 경우는 또 어떻게 달랐을까? 한 팀의 독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2004시즌 역시 1992시즌이나 1988시즌 못지 않았다. 페라리는 열여덟 차례의 그랑프리 중 열 다섯 차례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폴 포지션 12회, 패스티스트 랩 14회의 압도적인 기록을 남겼다. 원-투 피니시로 끝난 그랑프리만도 시즌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여덟 번이나 됐다. 슈마허는 혼자서 팀 순위 2위의 BAR이나 3위 르노보다 많은 포인트를 쓸어 담았다.
심지어 슈마허와 격차가 컸던 바리첼로의 포인트도 BAR보다 단 5포인트 뒤져있을 뿐이었다.
2004시즌 페라리의 독주에 학을 뗀 팬은 적지 않다. 짧게 보면 2004시즌 자체의 독주도 문제였지만, 팀 순위를 가리는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 6년 연속,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5년 연속으로 페라리와 슈마허가 왕좌를 차지한 것이 독주의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불과 7년 전까지만 해도 ‘페라리가 챔피언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던 팬들도 빨간색이 좀 덜 보였으면 하는 고민을 내비치기도 했다. 슈마허 개인으로 보면 일곱 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으니 일부 팬들에겐 어느 정도 지겹게 보일 수도 있었다. 물론 실제 경쟁의 과정이 그렇게 만만치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기억력은 그렇게 치밀하지 못했다.
어쨌든 2004시즌의 페라리는 현대적인 F1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팀의 모습을 보여줬다. F2004는 강했고 슈마허는 빨랐다. 레이스카의 속도뿐 아니라 조종성과 안정성, 레이스에서의 신뢰도 면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2004시즌 10개 팀 중 리타이어가 가장 적었던 팀이 바로 페라리였다. 물론 2004시즌 이후에도 2011시즌처럼 몇 차례 한 팀이나 한 드라이버의 독주가 이어지긴 했지만,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으로 따지자면 2004시즌의 페라리와 슈마허만한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2014시즌의 메르세데스는 과연 어떤 경우에 해당할까? 일단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적어도 시즌 초반의 페이스만큼은 그 어느 해 못지 않은 독주가 예상된다. 그러면 올 시즌은 재미가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2004시즌과는 반대로 올 시즌의 메르세데스는 최근 몇 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던 팀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챔피언 타이틀을 4년 연속 독식했던 레드불과 경쟁하고 있는 팀이다. 두 드라이버의 성적이나 퍼포먼스에 큰 차이가 없는 것도 1992시즌처럼 루즈한 경쟁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이쯤 되면 문제는 로스버그와 해밀튼 듀오가 1955시즌의 판지오와 모스, 1988시즌의 프로스트와 세나에 견줄만한 인기 견인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한 팀이 독주하는 것보다 여러 팀이 재미있게 경쟁하는 것이 재미있다. 어쨌든 한 팀이 독주를 한다면 두 팀메이트가 비슷한 성적을 내면서 팀메이트간 경쟁을 펼치는 것이 낫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F1 역시 모터스포츠이고 레이스가 중심이라는 점이다. 레이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신문 기사 속에서 결과만 찾아보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내용의 레이스가 펼쳐지는가 하는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얘기다. 지난 바레인 그랑프리에서 메르세데스가 압도적인 우세 속에 원-투 피니시로 마무리됐지만, 레이스의 내용만으로 평가했을 때 그 어떤 그랑프리보다 재미있었다고 평가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