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을 통해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휴가 첫 날 회사에 정상 출근했다는 기사가 자랑스럽게 실렸다. 휴가 기간에 출근을 하고 안하고에 대해 논평을 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직장 생활을 좀 해 본 사람이라면 회장님의 출근이 회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아랫 사람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달 헝가리 그랑프리를 마지막으로 F1 2014 시즌의 전반기가 모두 마무리된 뒤 F1 팀들 역시 여름 휴가에 들어갔다. 후반기 개막을 알리는 벨기에 그랑프리까지 4주가 조금 안 되는 꿀 같은 휴식 기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F1의 여름 휴가 기간에는 ‘의무적인 2주간의 공식 휴가’가 포함된다. 무한 경쟁이 반복되는 스포츠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의무적인 공식 휴가 기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회장님이 휴가 첫날 출근했다고 보도자료를 뿌리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모습과 비교해 약간의 문화 충격을 받는다.

F1에서 각 팀을 이끄는 미캐닉과 엔지니어들의 권익을 위해 ‘최소한의 휴식’을 보장하는 제도로는 의무적인 2주간의 의무 휴가와 ‘커퓨’라고 불리는 야간 작업 제한 제도 등이 있다. 사실 우리나라와 비교해 사뭇 다른 서구의 업무 문화를 생각하면 공식적으로 작업을 제한하는 이런 제도들의 존재는 조금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작업 제한이 주어지는 기간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 뒤에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휴식을 취하거나 자신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소 부자연스러운 ‘휴식을 강제하는 제도’가 탄생한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F1 역시 무한 경쟁이 펼쳐진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들이 쉴 때 내가 작업을 더 한다면 조금이라도 나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우리 팀이 쉬고 있는데 다른 팀이 많은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맘 편히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모든 이들이 능률이 떨어지든 몸과 마음이 지치든 개의치 않고, 휴식 없는 노동 경쟁의 악순환에 빠진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F1 역시 이런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핏 생각했을 때 당연히 더 많은 노동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만 같은 기대와 달리 실제로 과도한 작업은 원치 않는 결과를 낫는 경우가 더 많았다. 미캐닉과 엔지니어의 과로는 차량의 안전, 결국 드라이버와 그랑프리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주말 내내 펼쳐지는 그랑프리 기간 매일 밤을 새며 작업을 계속하던 미캐닉들의 몸과 마음이 정상 궤도를 벗어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무언가 조치가 필요했다.

이처럼 무한 노동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랑프리 기간 도입된 제도가 ‘커퓨’라고 불리는 야간 작업 시간 제한이다. ‘만종’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커퓨는 그랑프리 주말 연습 주행 전후로 일정 시간이 되면 가라지를 완전히 비워야 되는 제도다. 물론 사고에 의한 차량 파손 등 불가피한 작업 때문에 커퓨를 따를 수 없는 예외에 대한 규정도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도 차고에 들어갈 수 없는 단순 무식한 규정은 아니다.
이와 같은 커퓨 덕분에 미캐닉들은 밤샘 작업의 압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일정 지역 안으로는 꼭 미캐닉이 아니더라도 모든 이들의 출입이 지정된 시간 동안 금지되므로 어떤 편법으로도 커퓨의 빈틈을 노릴 수 없다. 해가 지면 쉬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가 최근 몇 년 사이에 F1 패독에도 돌아왔다. 초저녁까지 정신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던 핏레인은 일정 시간이 되면 쥐죽은듯이 고요해진다.
그랑프리 주말 차량을 다루는 미캐닉을 제외한 다른 사무 직원들의 경우 불야성을 이루며 밤샘 작업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커퓨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팀 수석과 테크니컬 디렉터 등의 수뇌부는 저녁 식사도 잊은 채 밤 늦게까지 회의를 벌이기 일쑤고, 홍보 담당, 호스피탤리티 담당 직원들 역시 낮과 밤이 따로 없다. 비교적 피로가 누적되어도 차량의 문제나 레이스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영향이 없는 이들은 커퓨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공간에서(가라지 주변에서는 안 된다. ) 워커홀릭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하지만 F1 팀들의 여름 휴가에 대한 규제는 커퓨보다 더 강력하다. 2주간의 휴가 기간 동안 각 팀의 본부는 모두 문을 닫아야 한다. 그랑프리 기간 가라지 주변만 통제되는 커퓨와는 스케일부터 다르다. 게다가 공식적인 미팅, 핸드폰을 이용한 문자, 그리고 팀 관계자의 모든 e-메일 전송이 금지된다. 한마디로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뜻이다.
물론 디자이너가 휴가지에서 새로운 차량 디자인에 대해 혼자 구상하고 집에서 자료를 찾아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팀 작업은 할 수 없는 셈이다. 모든 자료와 정보가 모여 있는 팀 본부가 문을 닫아버렸으니 놀러 가는 것 말고는 딱히 갈 곳도 없다. 덕분에 2주간의 의무 휴가가 시작되면 각 팀원들이 휴양지에서 촬영한 사진들이 SNS에 잔뜩 올라오게 된다.
이와 같은 휴식은 강제하지 않으면 실행될 수 없다. 윗 사람이 일한다고 아랫 사람이 일도 없는데 자리를 지켜야 하는 어느 나라의 이상한 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남들은 일하는데 나만 논다는 느낌은 받지 않으려면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여름 휴가 기간의 캘린더를 비우는 동시에 의무 휴가 기간을 추가함으로써, 드디어 F1 팀원들도 사람 사는 것 같이 살 수 있게 됐다.

여름 휴가의 강제는 팀 스포츠로서 F1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랑프리와 레이스가 드라이버 한 명의 역량만으로 치러질 수 없고 미캐닉과 팀 수뇌부가 함께 호흡할 때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차량의 설계와 제작, 팀의 운영, 홍보와 마케팅까지 모든 부분은 유기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각자 자기의 일만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주변 팀원들의 작업도 언제나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개인 작업이 아닌 서로 함께하는 유기적 작업을 통해 차를 만들고, 정비하고, 레이스를 준비하는 모든 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에, 여름 휴가 기간의 의무 휴가가 주어지면 말 그대로 모든 작업이 ‘올-스탑’ 상태에 빠진다. 만약 몇 명의 뛰어난 사람이 팀을 좌지우지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휴가 기간의 강제는 큰 의미가 없었을지 모른다.
결국 강제된 휴가 기간 덕분에 말단 직원은 물론 팀 수석과 수뇌부, 핵심 인력들도 모두 동시에 휴식을 취할 수 밖에 없다. 누구 한 명이 일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데 바보 같이 일을 잡고 있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름 휴가의 강제에 ‘드라이버’를 별도로 취급하지 않는 것 역시 ‘F1은 드라이버 혼자 승부하는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 어떤 F1 드라이버도 많은 팀원들과 유기적으로 작업하지 않는 이가 없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회사라고 할 수 있는 F1 팀은 그랑프리 기간 철저한 야간 작업 금지 규정과 2주간의 여름 휴가 기간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 휴가 기간 첫날 팀 수석이 출근해 일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으며 제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얘기하면 하나의 팀이라고 할 수 있는 회사의 경우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F1에 커퓨와 의무 여름 휴가가 도입되었다고 해서 절대적인 작업량이 줄어들거나 작업의 질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반대로 충분한 휴식은 실수를 줄이는 동시에 의욕적인 작업에도 도움을 주기 때문에 안전한 차량과 높은 퍼포먼스, 즉 회사의 경우를 비유하면 ‘뛰어난 품질’과 ‘높은 생산성’을 가져올 수 있다. 그렇게 확신했기 때문에 커퓨와 의무적인 여름 휴가가 생겨난 것이다. F1과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자 회사라는 팀의 규칙을 만드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