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면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라는 구절이 나온다. 흔히 ‘온고지신’이라고 줄여 부르는 말의 유래가 여기에 있다. ‘옛 것을 찾고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 만 하다.’는 뜻이다. 옛 학문을 연구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학문을 이해해야만 남을 가르칠 수 있다는 의미다. 조금 더 나아가서 옛 것에만 머무르거나 새 것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F1은 빠르게 변하는 최신 기술의 집합체이며 첨단 기술의 경연장이다. 매년 바뀌는 규정에 발맞춰 매 시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철학이 담긴 차량이 새롭게 등장한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과거의 기술이 다 쓸모 없어 보이고, 새로운 트렌드만 알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실제 F1은 기회가 될 때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젊은 팬들에게 옛 이야기를 늘어놓고,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그렇다면 최첨단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F1은 왜 최신 기술이나 트렌드와 동떨어져 보이는 옛 것들에 목을 매는 걸까?

F1이 ‘지신’ 뿐 아니라 ‘온고’에 비중을 두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F1의 본질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초기 자동차의 역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랑프리 레이싱의 탄생과 자동차 산업의 융성은 완전히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자동차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레이스가 탄생했고, 그랑프리가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가 많은 관심을 받고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이미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가진 그랑프리 레이싱의 적자가 F1인만큼, F1에서도 자동차의 역사를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차를 구입해서 10년 타는 사람이 거의 없고 자동차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F1 관계자나 팬들이 가지는 ‘자동차의 전통에 대한 애착’은 상당하다. 꼭 자동차가 아니더라도 옛 것, 전통, 역사 등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은 우리나라의 것과 서구의 것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다. 또한 F1을 이끌어가는 핵심에 자리잡은 사람들의 마인드는 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보수적이다. 전통을 원래 좋아했고,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F1을 이끌고 있으니 옛 것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F1 팬들 역시 그런 전통을 매우 좋아한다.
지난 2014 영국 그랑프리의 레이스를 앞두고 실버스톤은 팬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레전드 퍼레이드’라는 이름으로 F1의 전설로 꼽힐 법한 수 십 대의 클래식 F1 레이스카들이 트랙에 나타난 것이다. 50년 이상 된 레이스카부터 10 여 년 전의 레이스 카, 그리고 보너스로 레드불 레이싱의 최근 레이스카까지 ‘F1의 역사를 장식한 전설적인 차량들’이 트랙을 메웠다. 더구나 이 레이스 카에 탑승한 상당수의 드라이버들이 과거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거나 F1의 역사를 일궜던 전설적인 드라이버들이었다는 점이 놀랍다. 전통을 사랑하는, 사랑해야만 하는 F1 팬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최고의 이벤트였다.

전통을 존중하고 옛 것을 다시 되새기는 문화는 2014 영국 그랑프리 하나에만 단편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상당수의 F1 그랑프리에서 드라이버 퍼레이드를 진행할 때 수십 대의 클래식카들이 함께한다. 우리나라에는 클래식 카 문화가 거의 없고 실제로 전국을 수소문한다 해도 22명의 드라이버를 태울 충분한 차량이 조달될 수 있는지 심히 우려스럽지만, 자동차를 조금이라도 탄다는 나라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이런 이벤트가 준비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드라이버 퍼레이드를 위해 클래식 카 22대를 조달하는 것은 그저 ‘있어 보이기 위해’ 혹은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 진행하는 이벤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목적이라면 최신 컨버터블 스포츠 카를 준비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F1의 선택은 옛 전통을 간진한 클래식카였다. 클래식카의 의미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한 없이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선택이지만 F1은 개의치 않는다.
과거의 그랑프리 레이싱이 없었다면 현재의 F1이 있을 수 없고, 수 십 년 전의 명차가 없었다면 현재의 자동차는 탄생할 수 없었다는 단순하고 알기 쉬운 이유가 이들의 클래식카 사랑을 설명해준다. F1 레이스 카든 스포츠 카 레이스에서 역사를 만들었던 차량이든, 레이스 이벤트와 관련은 없지만 나름 의미가 있는 차량이든 모든 클래식 카에 대한 사랑이 마찬가지다. 꼭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아니겠지만, ‘온고’와 ‘지신’을 겸비하려는 노력이라고 불러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듯 하다.

그렇다면 이런 역사와 전통에 대한 강조, 클래식 카에 대한 사랑은 단지 서구 문화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역시 어렵지 않은, 당연한 답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가깝게는 일본에서도 서구에서와 같은 클래식 카에 대한, 결과적으로 자동차에 대한 애정을 읽을 수 있다.
일본 그랑프리의 드라이버 퍼레이드에는 매년 수 십 대의 컨버터블 클래식카들이 투입되며, 드라이버들은 수 십 년 된 차량에 올라타고 관중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행사에 임한다.
일본은 자국의 자동차 산업이 크게 발달해 있고 오래 전부터 자국의 고유 차량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드라이버 퍼레이드에 투입되는 차량 중 대부분은 일본 자동차 회사가 제조한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서구 지역에서의 드라이버 퍼레이드와 비슷한 관점에서 준비된 차량들이 사용된다. 족보를 따지기에 앞서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아할만한 그런 차량들이다. 자국의 자동차 역사가 깊어야만 차를 좋아하고 클래식카가 동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물론 곳곳에 자동차 박물관이 만들어지고 클래식카가 이벤트에 동원되는 것이 자동차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단순한 이벤트 기획자도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이런 행사를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차를 제대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랜 기간 꾸준히 이벤트를 열 수 있고, 자연스럽게 클래식 카를 조달할 수 있는 사회를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들이 어렵지 않게 펼쳐지는 만큼 차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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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원래부터 이런 자동차 문화가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면 역사와 전통을 떠받드는 이벤트 같은 것은 불가능할까? 이런 물음에 답하기라도 하듯 올해 F1 싱가포르 그랑프리에서는 아시아에서 보기 힘들었던 이벤트가 펼쳐진다. 올 시즌 처음으로 싱가포르 그랑프리에 전설적인 명차들이 함께하는 ‘마스터스 히스토릭 F1 챔피언십’이 싱가포르 그랑프리의 서포트 레이스로 개최되는 것이 결정되었다.
자동차 시장이 매우 협소하고 자동차 문화와 관련해서 넓은 저변을 가질 수 없는 싱가포르에서 이런 이벤트가 개최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래 오랜 시간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자동차 문화의 역사와 전통이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지 않았다면, 기관이 주도하는 이벤트를 통해 그런 문화와 인식을 만들어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싱가포르 그랑프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동차의 과거를 돌아보는 고상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F1 그랑프리의 상품성을 높이고 자국의 관광 산업에 도움을 받기 위한 생각이 먼저인 것은 당연하다. 싱가포르 그랑프리는 애초에 팔리는 상품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투자였고, 자동차를 사랑하고 역사와 전통을 따지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단순한 소비자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F1 그랑프리에 그저 노래 부르고 춤추는 이벤트로 눈요기 거리를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정말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를 추구하는 방향성만큼은 높이 살만 하다.
우리나라에서 왜 자동차 문화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지, 모터스포츠는 왜 이리도 더디게 성장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만큼 현 상황에 대한 해석도 가지가지다. 그런데 이런 고민 속에 정말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좋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더해진다면 좋을 것 같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에 담긴 뜻대로 옛 것을 찾고 연구하는 노력과 새로운 시장의 개척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자동차의 역사와 전통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우리나라에 자동차 문화가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날로 먹으려는 생각이다.
F1 주변에서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주 보여주는 옛 것에 대한 집착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모터스포츠의 고객이 되고, 자동차 시장의 소비자가 된다. 때로는 그들의 성향이 예전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경우도 많지만, 싱가포르 그랑프리처럼 고객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도 생각할 수 있다. 역사와 전통을 내세울 우리나라의 자동차 기업이 없다는 건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 이제부터 어떻게 그런 전통을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이런 배경이 제대로 갖춰진 뒤에야 언젠가 다시 돌아 올지 모를 F1 코리아 그랑프리도 ‘제대로’ 개최될 가능성이 보다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