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TV F1 중계 방송에서 해설을 맡고 있기 때문에 종종 어떤 식으로든 연락처를 알아낸 분들이 여러 가지 경로로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굉장히 유익한 질문도 있고, 때로는 함께 고민하게 되는 질문도 있다. 질문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고마운 지적을 해주는 분들도 많다. 방송에서 말 실수를 한 것,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것 등을 지적해주시는 팬들 덕분에 지난 방송의 잘못을 정정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심심치 않게 ‘방송에서 이런 말은 쓰면 안 된다’는 받아들이기 힘든 지적을 하는 분들이 나타나곤 한다. 그 중에 F1 해설 초창기부터 얘기가 나왔고, 몇 차례 설명을 하긴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F1 레이스 카를 머신 이라 부르면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과연 그 지적은 타당한 것일까?

1. ‘머신’이란 표현은 사용하면 안 된다?
‘머신’이란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분들은, ‘머신’이란 말은 일본에서 잘못된 표현이 사용되다가 보편화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면 안 된다는 친절한 설명을 남기곤 한다. 필자의 경우 ‘머신’이란 표현을 흔하게 사용하지 않지만 아나운서/캐스터의 경우 종종 머신 이란 말을 쓰는데, 중계 방송의 공동 진행자인 아나운서/캐스터에게 머신 이란 말을 쓰지 않도록 교육시켜달라는 주문까지 곁들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머신(machine)’이란 표현은 영어권에서도 분명히 사용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머신이 옳다, 레이스카가 옳다라는 식으로 이야기 할 수 없는 문제다. F1 레이스카를 부르는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다르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표현 방법이 있다. 머신도 당연히 그 중 한 가지다.
물론 머신이 ‘F1 레이스카만을 위한 표현’인 것은 아니다. ‘머신’을 직역하면 많은 경우 ‘기계’로 번역하게 되는데, 말 그대로 모든 기계는 머신이다. 자동차 역시 기계의 범주에 들어 가기 때문에 머신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고리타분하게 따지지 않더라도 다수의 모터스포츠에 사용되는 차량들이 ‘머신’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해외 모터스포츠 중계를 다양하게 시청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2. F1 레이스카의 다양한 이름들
그렇다면 왜 ‘머신 이라 부르면 안 된다’는 오해가 생겨난 걸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나라에 모터스포츠가 널리 보급되지도 않았고, 영어권 중계 방송에 익숙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레이스카가 영어권 사람들에게 상당히 다양한 방법으로 불린다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혼란스러운 면일 수 있다. 실제로 F1 레이스카는 상황에 따라, 혹은 부르는 사람의 취향과 문맥에 따라 카, 레이스 카, 레이싱 카, 섀시, 머신, 레이싱 머신, 비히클, 오토모빌등 갖가지 단어로 표현된다.
물론 F1 레이스카를 부르는 각 단어들이 모두 완벽한 동의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F1에 대해 이야기하고 F1 그랑프리를 중계하는 사람들 역시 언어학자이거나 단어의 옳고 그름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상황이 허락한다면, 보다 재미있고 알아듣기 쉽다면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써서는 안 되는 표현만 아니라면’ 취사선택이 가능하다.
물론 상황에 따라, 취향에 따라 단어를 사용할 때도 분명한 한계는 있다. 카 혹은 레이스카와 같은 표현이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은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오해할 일이 없는’ 굉장히 보편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욱 보편적인 표현’인 머신 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비행기’나 ‘우주선’ 같은 표현으로 F1 레이스 카를 지칭해서는 안되겠지만, ‘머신’의 범주에는 분명히 자동차가 포함된다. 기계를 기계라 부르지 않으면 무엇을 기계라고 부를까?

3. 일본에서 흔하게 잘못 사용되는 표현?
‘머신’이란 표현이 일본에서 유래했으며, 자동차를 ‘머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본의 잘못된 문화라는 주장도 당연히 설득력이 없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영어권에서 머신이라는 표현을 적지 않게 사용하는 마당에, 일본이 이 표현을 만들어 영어권에 보급시켰을 리도 없거니와, 일본 전통 문화도 아닌 영 단어를 영어권 사람들이 일본에서 배워갔을 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머신’이란 표현이 잘못 유행하고 있다는 오해는 아마도 일본에서 ‘머신’이란 표현을 상당히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불러일으켜졌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영어권에서 레이스 카를 부를 때 ‘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면, 일본에서는 ‘머신’이라는 표현을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한다는 느낌이 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관련 서적이 일본 서적을 그대로 베끼거나 직역한 경우가 많고, 우리나라의 자동차 기술, 문화의 상당 부분이 일본의 그것을 답습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덩달아 ‘머신’이란 말이 많이 보급된 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일본식 영문 표기’가 ‘잘못된’ 표현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머신’도 그런 오해를 받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마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머신’이라고 부른다면 그 표현이 일본식이라 쓰면 안된다고까지 할 문제는 아닌 듯 하다. 일본에서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라도 원래 틀린 표현이 아니라면 사용하면 안될 표현까지는 아닐 것이다.

4. 무엇이 머신인가?
그렇다면 어떤 범위의 차량까지를 머신 이라 부를 수 있고, 무엇을 머신 이라 부르는 것이 적당한 것일까? 일단 머신이라는 단어 자체는 ‘기계’라는 굉장히 넓은 의미를 지녔지만, 실제로 통용될 때는 생각보다 의미가 한정되는 면도 없지 않다. 꼭 그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보통 ‘뭔가 규모 있는 기계’라는 느낌이 들 때 머신 이란 표현을 사용한다면 좀 더 적당하다는 느낌이다. 간단한 장난감 자동차보다는 레이스를 위해 조금이라도 개조된 자동차, 혹은 레이스를 위해 만들어진 레이스카가 ‘머신’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듯 하다.
실제로 영어권에서는 ‘레이싱 머신’이란 표현이나 자동차 회사 ‘누구누구의 머신’이란 식으로 단어를 사용하곤 한다. 때로는 자동차뿐 아니라 바이크에 대해서도 머신 이란 표현이 사용되는데, 일부 모터싸이클 레이스의 중계 방송에서 바이크 리스트를 표기할 때 머신 이란 단어를 자막에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자막으로 이런 단어가 분명히 사용되는 걸 본다면 ‘영어권에서 머신 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란 주장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것이 분명하다.
머신 이란 단어가 사용될 때는 ‘기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길 때가 많기도 하다. 다루는 사람의 기술이나 힘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는 ‘기계 장치’라고 하더라도 머신이라는 표현을 쉽게 사용하지 않는 듯 하다. 반대로 기계가 가진 힘의 극한을 보여주고 기술의 한계에 근접한 F1과 같은 경우에는 머신 이란 표현이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F1처럼 ‘보통 자동차와 느낌이 상당히 다른’ 기계에 대해 ‘머신 이라 부르는 것이 좋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물론 꼭 그래야 하는 이유는 없다.
레이스카는 자동차이고, F1 역시 자동차기 때문에 영어권에서 ‘카’라는 쉬운 표현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머신’이란 단어 역시 영어권에서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표현으로 ‘중계 방송에서 써서는 안 되는 표현’이라거나 ‘잘못된 단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바른 외래어 표기, 발음 방법이나 적절한 방송 용어의 선택 문제까지 논하자면 얘기가 훨씬 복잡해지겠으나, 안 그래도 복잡하고 많은 이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F1 중계 방송의 해설에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